박송희는 두번째 스승 김소희에게 춘향가 <초앞>과,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사사했다.
판소리 흥보가로 이름을 알린 박송희는 사실 춘향가와 심청가 그리고 적벽가까지 두루 섭렵한 소리꾼이다. 한 가지 소리를 간직하기도 어려운 때에 여러 소리를 만났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박녹주 선생님께서 ‘내가 죽고 나면 네 선생 할 사람은 박봉술 밖에 없다’ 하시더니 박봉술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셨어요. 송만갑 선생님 제자로, 그때 당시 적벽가를 제일 잘하는 분이 박봉술 선생님이라고 얘기하셨거든요. 그리곤 ‘우리 송희, 적벽가 좀 알려주소!’하셨죠. 제가 적벽가를 배우는 동안, 매일 공부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주시기까지 하셨어요.”
박송희는 그때 스승의 마음이 너무도 감사해, 적벽가를 다 배우고도 밖에선 박녹주에게 배운 흥보가만 불렀다.
1949년 ‘여성국악동호회’의 두 번째 작품, <햇님 달님>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당시, 그곳에서 또 다른 스승 김소희와 박귀희를 만났다. 특히 김소희는 소리를 배우러 온 박송희에게 갈비며 굴비를 아끼지 않고 꺼내 밥을 먹이고 자신이 부를 소리를 앞서 부르더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자를 아꼈다.
“하루는 김소희 선생님과 어느 모임에 갔는데, 사람들이 소리를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께 배운 <범피중류>를 자랑스레 불렀죠. 근데, 부르다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 뒤에 부르실 소리를 눈치 없이 먼저 부른 거더라고요. 그래서 절반까지만 부르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너니까 가만 뒀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가만 안 둔다!’ 하시곤 넘어가주셨어요.”
김소희는 1993년, 박송희가 첫 번째 제자발표회를 할 때에도 ‘거짓도 없고, 요사도 없고, 허세도 없으며, 남을 헐뜯는 법도 없고, 양보할 줄도 아는 우리나라 여성 중의 여성이지요.’라고 박송희를 극찬하는 추천사를 써주었다.
“저는 스승 복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포기하지 않고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김소희 선생님은 박녹주 선생님만큼이나 잊을 수 없는 스승님이죠.”박송희는 김소희에게 춘향가 <초앞>과,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사사했다.
잊지 못할 감동의 무대
남산골기획공연 <예인, 한옥에 들다>
오늘의 예인 -박송희 인터뷰
최고령 소리꾼의 삶이 녹아든 소리
글_김보나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박송희
‘신의’를 지키라는 스승의 말씀을 따라 소리에 대한 신의,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살았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굽이굽이 넘어 이제, 봄날 만개한 꽃처럼 온화한 미소로 관객과 마주하는 소리꾼, 박송희를 만나본다.
음악 학교, 광주권번에서 창극단까지
박송희는 1927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어린 박송희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광주권번’에 입학시켰는데 그때의 ‘광주권번’은 지금의 음악 학교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그렇게 소리꾼 박송희의 삶이 시작됐다.
“권번에 들어가 몇 년간 소리 공부를 하고 졸업과 동시에 ‘동일창극단’에 입단했어요. 창극단에 유명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거기서 연기도 배우고 토막소리도 배웠죠.”
박송희가 19살이 되던 해, 동일창극단은 해방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났고 어린 나이에 만주까지 따라갈 수 없었던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극단이 신의주에 있을 때 조국은 해방을 맞았고 그길로 돌아온 창극단 사람들은 조국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극단 사람들이 계몽운동 하는데 '같이 갈래?' 하기에 따라 나섰어요. 그때 광주 경찰청장의 차를 타고 다녔는데, 거기서 남편도 만났죠.”
소리 인생을 열어준 스승, 박녹주
박녹주는 박송희에게 본격적인 소리 인생을 열어준 스승이었다.
남편과 함께 광주에 살던 박송희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 건 임방울의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방울은 소리로 ‘통정대부’의 품계까지 받았던 동편제 소리꾼, 이동백 선생의 추모식에 가자며 박송희를 서울로 불렀고 서울에 올라온 박송희는 그 길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셔야 했기 때문에 곧 광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후 시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상을 지낸 뒤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어요. 그때 소리가 배우고 싶어서 돈도 없이 무작정 박녹주 선생님을 찾아갔죠. 근데 선생님께서 ‘돈이 무슨 필요가 있나! 소리만 잘하면 됐제. 사람은 신의만 있으면 된다’하시곤 저를 제자로 받아주셨어요. 그때부터 선생님이 계시던 종로로 또, 면목동으로 소리 공부를 하러 다녔죠.”
박녹주는 어려운 시절 배까지 굶으며 공부하러 찾아오는 제자를 위해 조용히 어묵을 사서 먹이며 은근하고 깊은 사랑을 제자에게 주었다. 박녹주는 박송희에게 본격적인 소리 인생을 열어준 스승이었다.